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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문
2010.02.27 03:02

矢內原忠雄(야나이하라 타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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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이하라 타다오(矢內原 忠雄 시내원 충웅 やないはら ただお, 아래 사진-야나이하라 묘:출처)


소년과 청년시대: 1893년 1월 27일 현재의 에히메 현(愛媛(えひめ)県) 이마바리 시(今治(いまばり)市)에서 의사의 아들로 출생한 야나이하라(矢內原)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고베 제일중학교에 그리고 이어 1910년에 동경 제일고등학교 법학과에 진학하였는데  바로 이 동경제일고등학교에서 우찌무라간조와 홋가이도 삿보로 농학교 동급생이며 그 고등학교의 교장 선생인 니토베의 교육을 통해 인격적인 감화를 받게 된다: “동시에 니토베 선생이 인간의 자유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 자유와 책임이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 깊이있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하는 것은 우찌무라 선생의 신앙에 기초한 가르침에 병행하여 나라고 하는 인간을 형성시켰다”(전집 26:238). 야나이하라는 1911년 10월 1일 우찌무라간조(内村鑑三)의 성서연구집회에 들어면서부터 기독교 신앙과 접촉하기 시작한다. 다음 해 1월 우찌무라(内村)의 사랑하는 아내의 장례식과 고별식에 참석한 그는 우찌무라의 태도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우찌무라는 “ ‘이것은 우찌코의 고별식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결혼식을 하는 것입니다. 우찌코 만세’라고 하였으며, 이 말에 놀란 야나이하라는 온 몸에 전기가 통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 (일본기독교의 발자취. 김수진. 한국장로교출판사. 2003년. 119쪽)기 때문이다. 이 때 야나이하라는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는데 앞으로는 내 인생을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살아야겠다’는 굳은 의지를 갖게됐다. 1912년 3월22일에는 어머니를 그리고 1913년 10월1일에는 아버지를 잇따라 여윈 야나이하라는 심중에 커다란 고통을 받는다. 기독교 신앙 없이 세상을 떠난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견디지 못한 그는 질문을 하러 야밤에 우찌무라를 찾아갔으나 ‘나도 알수 없다’라는 의외의 답과 더불어 ‘신앙을 계속하라는 간곡한 충고’를 받은 야나이하라는 사람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어야 겠다는 가르침을 얻는다.

세상에 나가다: 동경제일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1913년 대정2년 20세에 동경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에 입학한 그는 1917년 동대학을 졸업, 집 근처의 新居浜銅山에서 사무를 보게 됐으며 이 해 西永愛子와 결혼하여 가정을 갖게 된다. 그러다가 1920년 동경제국대학식민지정책 교수였던 니토베(新渡戸)가 국연사무국차장에 임명되면서 그의 제자였던 야나이하라가 그의 후임으로 부임한다. 이로부터 일년 여 뒤, 약 2 년 반 동안 이태리 독일 미국 블란서에 유학한 그는 1923년 3월 26일 귀국하였지만 불행하게도 얼마있지 않아 그의 부인이 사별하고, 다음 해 그는 친구의 강한 권유로 인해 프리머스형제단의 여자교인인 堀恵子와 결혼한다. “그는 식민지 정책론을 강의하려면 조선과 대만을 답사해야 한다면서 먼저 조선을 답사하였다. 조선을 답사한 후 그는 ‘나는 조선 보통학교의 수업을 참관한 적이 있는데, 조선인 교사가 조선인 아동들에게 일본어로 일본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보고 마음 속으로 눈물을 흘린 적이 있습니다’ 라고 말한 일이 있었다. 그후 대만도 답사를 하였지만 그 형편은 조선과 같았다. 그는 개조(改造)라는 잡지에 두 식민지역을 방문한 후 글을 발표했는데, 이 글이 지상에 발표되자마자 경찰청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고, 곧 도쿄 제국대학에서 추방을 당하였다. 그후 그는 가신(嘉信)이란 잡지를 발간하였다. 그리고 조선을 드나들면서 조선에서 추진하고 있는 황민화운동에 대해서 비판을 하다가 추방당했던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일본기독교의발자취, 120쪽).

복음의 사도가 되다: 1930년 3월 28일 우찌무라간죠(1830~1930)가 세상을 떠나자, 복음의 사도로 세워진 7인의 제자 곧 야나이하라를 비롯하여 藤井武(ふじいたけし)、畦上賢造(あぜがみけんぞう)、三谷隆正(みたにたかまさ)、金沢常雄(かなざわつねお)、黒崎幸吉(くろざきこうきち)、塚本虎二(つかもととらじ)이 동년 5월 28일에 모여 우찌무라가 해 온 영적인 싸움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우찌무라 기념 강연회를 개최했다. 야나이하라의 싸움터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동년 7월 藤井武이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가장 절친했던 신앙의 동지이며 예언자였던 藤井武의 영적인 싸움을 계속 이어가면서 그 후 짧은 기간동안이나마 그의 전집을 간행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이다.

학자로서 싸우다: 학자로서의 야나이하라는 당시 학계의 지배적 전제였던 맑스주의와의 싸움을 통해서 신앙과 과학의 문제를 집어 들었다. 그 문제에 대해 야나이하라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 과학과 신앙의 문제는 차원이 다른 것이어서, 그 사이에 단층이 존재한다. 과학에는 과학의 세계가 있고 신앙에는 신앙의 세계가 있다. 그것은 다른 세계이다 . 그러나 과학을 열심히 배움에 의해서 신앙 사이의 미신적인 요소를 제거할 수 있다. 또 순수한 신앙에 의해서 과학에 고결한 정신과 희망을 줄 수 있다. 이렇게 하므로서 나에게는 그 문제를 해결하였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전집 26:241~2).

그러나 이러한 해결책은 과학과신앙의 세계를 서로에 독자적인 것으로 구분했다는 점에 있어서 칸트식의 방법을 받아들인 것처럼 보인다. 뿐만 아니라 순수한 신앙에 의해서 과학에 고결한 정식과 희망을 제족할 수 있다고 본 것 역시 어찌보면 칸트식의 접근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과학을 초월하는 기독교 도덕의 실천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자유신학자로서 서로에 연결된다. 따라서,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가 야나이하라를 ‘온건 기독교적 자유주의자’로 평한한 것에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cf.100년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17. 동양이 본 개화기 조선-박노자 교수 참고: 2003년 5월 28일 중앙일보)

1932년 9월 만주조사여행 중에 열차강도를 만났던 적이 있었는데, 이 때 거의 모든 승객이 물건을 탈취당하거나 상해를 입었던 그 와중에서도 야나이하라의 객실은 피해를 면했다. 이 사건을 통해서 그는 신의 임재를 경험하고 ‘신은 나의 피난처 나의 성 나를 도우시는 주’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신의 은혜를 전하기 위해 ‘통언’(通信)을 발행하기 시작한다.

“야나이하라는 만주를 직접 시찰하고 나서 만주사변에 대한 책임이 일본 정부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1932년 3월 우찌무라 제3주년 기념강연회, 8월 특별강연회에서 만주문제를 논하고, 대 중국정책의 전환을 요구하셨다. 그의 다음과 같은 외침은 그가 일본 정부의 식민지 정책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정말 애국심은 우리나라를 바르게 하는 것 이외는 없는 것이다. 국민의 죄를 회개하도록 촉구하고 국가를 하나님의 정의와 도덕위에 세우는 일이 애국심인 것이다. 거짓과 죄악 위에 세우게된 국가는 군비 재력에 충실하고도 결국은 망해버리는 것이다.’(전집18:536, 도히아키오, 일본기독교사, 366). 한 마디로 ‘야나이하라는 성서에서 배우고 거기에서 얻은 통찰력을 가지고 국가 정의나 공평을 문제로 삼고 사회과학적 지식을 구사하여 국가의 정책을 비판하고 있었다’(도히아키오, 일본기독교사, 367). 확실히 그의 생각은 전쟁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군국주의를 행해 나가는 국가 정세를 우려하고 전쟁 반대 의지를 표명하면서도 그것이 성서를 연구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데 방해되지 않는다면 단지 생각으로만 머물러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우찌무라의 제자 츠카모토의 입장과는 달랐다. 그러나 야나이하라도 1941년 12월 ‘嘉信’(1938년 1월, 45세 때 야나이하라 자신이 창간함)의기독교와 일본에서 일본은 일군만민 천황을 위로 모시는 국체를 이루어야 하고 ‘이 천황제 국체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도가 관철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위의책 317). 비록 그 역시 ‘일군만민의 천호아제 이데올로기’에서 완전 해방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야나이하라는 항상 우찌무라의 입장에 서 있으려는 전형적인 인물이었다”(2002한국기독교회사, 박용구,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 한국교회사연구소, 서울, 700쪽, 2002년)

관련 문서: 맑스주의와 기독교 서문, 맑스주의와 기독교의 출발점, 이데올로기로서의 이슬람과 공산주의,

참고문헌: 1) 일본기독교의 발자취 ( 김수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교육부. 서울. 한국. 2003.)
              2) マルクス 主義と基督敎 ( 矢內原忠, 一粒社, 名古室市. 일본. 1933.)
              3) 2002 한국기독교회사 (박용규,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한국교회사연구소. 서울. 한국. 2002.)
              4) 사이트: http://www.asahi-net.or.jp/~hw8m-mrkm/kate/00/yanaihara.lif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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