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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2010.12.08 04:08
[re] 한국교회 연합 운동의 방향_개혁신학과 WCC 에큐메니즘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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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63486[개혁신학과 WCC 에큐메니즘-④ 한국교회 연합 운동의 방향] 본질 굳게 잡고 진리 안에서 일치 이뤄야
정준모 목사(대구성명교회·대신대 교수)
2010년 02월 09일 (화) 13:02:38 기독신문 ekd@kidok.com
개혁원리 따라 스스로 개혁될 때 의미
신앙 훼손되지 않는 대화·포용은 계속
▲ 정준모 목사
1. 개혁신학의 연합운동 원리
한국교회는 성장의 갈채 속에 분열의 상처가 크다. 한국교회사는 괄목할 숫적 증가 속에 뼈아픈 사분오열의 찢어진 자국이 깊다. 한국교회는 장로교는 물론 모든 교파가 분열 되었다. 현재도 진리가 아닌 교권주의, 지역주의 문제로 마치 폭력의 아수라장이 된 정계처럼 가슴 아픈 현실이다. 합동은 무엇이며 통합은 무엇인가? 예수교는 무엇이며 기독교는 무엇인가? 예수와 그리스도를 갈라놓은 이 분열의 현장에 교회 연합과 일치를 위한 자성의 매질을 스스로에게 할 때가 이미 지나지 않았는가?
진리 안에서 연합과 일치
교회는 진리의 순수성과 교회의 연합성이 항상 병존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의 연합을 위하여 진리를 훼손해서는 결코 안 된다. 칼빈은 잘못된 교리와 생활에 대항하는 싸움은 연합과 일치를 파괴하는 분리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하나됨을 보존하는 일로 보았다. 오토 베버(Otto Weber)에 따르면 칼빈은 개신교의 공통적 교리라는 울타리 안에서 상호간 차이에 대한 관용적 입장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교회 연합과 일치는 진리가 왜곡되거나 이탈된 상황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오직 진리 안에서 진리를 근거로 연합과 일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진리 안에서 연합과 일치가 아니면 참된 연합(unity)이 아니라 획일적 일치(Uniformity)가 될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가 아닌 교파나 교단의 결정을 절대적 규준을 삼고 연합과 일치를 제한시키고 교류를 단절하는 등 극단적이고 폐쇄적 행동은 결코 개혁주의 신학 원리를 따르는 것이 아닐 것이다.
무분별한 분리는 절대 불허용
칼빈은 참된 교회의 표지를 말씀과 성례로 보고 교회가 이러한 표지를 이탈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일이며 반역자요 배도자로 간주하였다. 물론 칼빈이 주장하는 교회의 표지는 칼빈의 시대의 정황이고 현 한국교회 상황에서 재조명되고 재평가되어야 할 부분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오늘날 진리를 주장하면서 진리가 아닌 독선, 아집, 편견, 왜곡으로 말미암은 교회 분리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 개혁교회는 “가장 좋은 것은 모든 문제에 대하여 완전하게 의견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신앙의 총체에 해가 되지 않고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용인해야 할 것이다…사소한 의견차이 때문에 분별없이 교회를 저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라는 칼빈의 교훈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개교단 우월주의 극복
교단 절대주의, 타 교단 배타주의를 극복하고 성경적 교회로 돌아가 하나 되어야 한다. 자신이 속한 교단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을 가지되 타 교단에 대한 열린 마음으로 관용과 이해를 가져야 한다. 한국교회의 분쟁과 분파는 다른 진리 때문에 갈등과 분리의 길을 걷기보다는 대체로 편협과 왜곡과 이해관계에서 파생되었다고 보는 것이 교회사가들의 일반적 평가이다. 교회의 분열은 쉬워도 연합은 어렵다. 한번 분리되어 고착되어 버린 때에는, 다른 형제 교단으로 이해, 관용, 교류하기 보다는 이단적 색안경을 끼고 보는 부정적 입장들 때문에 다시 연합하기 결코 쉽지 않다. 또한 진리 문제를 제외하고는 타 교단의 정서, 입장, 특징을 최대한으로 다양성을 인정하고 수용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기 위하여 열린 자세로 상호 연대성을 가지고 연합과 일치를 위해 힘써야 한다. 그 좋은 역사적 사례는 26년 만에 이뤄진 합동 교단과 개혁 교단의 합동이다.
복음이 훼손되지 않는 종교 대화
1961년 WCC 뉴델리 총회, 1968년 웁살라 총회를 거치면서 종교다원주의가 발흥하기 시작할 때부터 종교간 대화 문제가 심도 있게 논의되었다. 1983년 WCC 밴쿠버 총회에서는 타종교인을 초청하여 종교간의 대화에 관한 신학적 주제 발표가 있었다. 더욱이 1990년 WCC 바아르 선언문(Baar Statement)은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하면서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공식 선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유일성을 포기해버린 그들과 종교적 대화가 가능한가가 참으로 의문시 된다. 더욱이 WCC가 추구하는 로마가톨릭과 일치, 종교간의 대화를 넘어선 종교통합의 목표는 절대 용납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타종교와 대화는 진리 교리와 복음 진리가 없는 인본주의적 만남은 결국 기독교의 꽃밭이었던 유럽교회가 황폐화되어 이제는 가장 절실한 선교 대상지역이 되어버린 그 비극적 역사 현장을 한국교회는 재현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1973년 WCC 방콕대회 이후 서구 제국주의 선교가 오히려 선교지를 억압했기에 이제는 더 이상 선교는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선교 모라토리움(Moratorium)을 선언하였다. 이것은 바울의 위대한 선교지였던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의 아름답고 위대한 하기아 소피아 교회당에 십자가가 사라지고 이슬람교의 초승달이 달려있는 모습이 내일의 한국교회의 투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역동성을 가진 개혁교회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시키기 위하여 타 종교인들에게 복음의 위대성과 진취성을 가지고 열린 자세로 국가 현안문제, 남북통일, 사회봉사 등을 위하여 독선적 외골주의 내지 폐쇄적 절뚝발이가 되지 말고 열린 자세로 만남과 대화의 길을 열어 놓아야 된다. 그러나 숙지해야할 사실은 WCC가 주장하는 연합은 단지 참다운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뿐만 아니라 타종교까지 포함된 연합이다. 또한 WCC의 그리스도의 구원 개념을 기독론적 구원 즉, 십자가 복음과 죄 용서의 수직적 복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교 입장에서 사회구조악으로부터 구원인 수평적 차원에서 인본주의 연합일 뿐이다.
2. 신학적 경계선 선언: 개혁주의와 복음주의 차별화
한국 교계 내에서 복음주의라는 용어만큼 가장 신학적 전문용어로 애매모호하게 사용되는 말은 없을 것이다. 한국 교계에서는 현실적으로 복음주의라는 용어는 자신들이 지지하는 신학적 입장이 가장 성경적이고, 정통적이고, 건전하고, 복음전도와 교회성장을 지향하고 있다는 방편으로 복음주의를 신학적 정립 없이 무분별하게 남용하고 고착해 버렸다. 개혁주의라는 말을 쓰면 시대에 뒤 떨어지는 구식 같고, 자유 혹은 진보주의라는 색깔을 보이면 신학적 시비에 휩싸일 것 같아 신학적 회색지대를 서성거리는 자들이 많다. 그들은 대외적으로는 신학적 진보주의를 추구하고 내적으로 개혁신학 미온주의 내지 교권 내 겁쟁이들이 됐다. 이처럼 신학적 타협추구자들은 신학적 회색지대에 머뭇거리면서 복음주의라는 옷을 입고 결국은 세속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을 향하여 군침을 흘리고 있다. 이처럼 건전하고 건강한 복음주의라는 용어가 한국 장로교 상황에서는 개혁주의라는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 자유주의, 진보주의를 추구하는 자들이 신학적 중용주의자, 신학적 회색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말이 되고 말았다. 벤자민 워필드(Benjamin B. Warfield)의 “기독교의 가장 큰 위협은 반기독교 세력이 아니다. 이슬람이 아무리 칼을 들이 대도 기독교를 없앨 수는 없다. 아무도 불교가 기독교를 삼킬 것이라고 걱정하지 않는다. 도리어 시대마다 등장하는 타락한 기독교야말로 기독교의 생명을 가장 크게 위협하는 존재다”는 말을 뼈아픈 말로 기억하고 우리 개혁주의를 추구하는 목회자, 신학자, 성도들은 각성과 자성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 한국교회는 〈교회의 위기: 신학교육의 재앙〉 이란 명저에서 꼬집은 존 리이스(John Leith)의 주장처럼, “교회 내의 가장 심각한 위기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대한 분명한 고백이 없는 것이다”는 말을 심각하게 들어야 할 것이다. 그는 미국 교회의 위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배제되고 포용주의와 다원주의 바탕을 둔 신학교육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신학교육이 정통교리보다 사회윤리, 사회참여, 인도주의 활동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세상문화와 차별화된 명확한 기독교 비전을 갖지 못했고 교회 강단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신랄하게 질타한 그의 결론을 한국교회는 겸손히 듣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메이쳔(John Gresham Machen)은 신학적 포용주의는 “적의 장수보다 더 무서운 존재인 적과 내통하는 아군 병사이다. 의심받지 않는 가운데 어느 순간 성문을 열어주는 자이다. 이단자와 거짓교사와 자유주의 신학자는 정체가 뚜렷하기에 교회가 경계태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면서 또한 자유주의 기독교에 교회의 문을 개방하는 사람은 이단자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유해하다”는 경고는 작금 한국 개혁주의를 표상하는 교단내의 현실이 아닌가?
3. 제 10차 WCC 부산 총회: 갈등 극복 및 발전적 제언
한국교회는 2013년 부산개최 WCC총회를 마치 신이 내린 축복처럼 들뜬 축제로 이끌어가는 진보측이나 무조건 반대를 위한 반대로 시위를 하고 집회장을 탈취하는 등 세상 사람들에게 진부하거나 추악한 꼴을 보여서는 안 된다. 한국교회가 급선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신학적 과업이요 작업이다. 또한 목회자와 성도들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교육과 이해가 요청된다. 교단적으로 우리의 개혁주의 신학의 탁월성, WCC 신학의 문제점, 한국교회의 복음 전도 사명 고취를 위한 특별 교육과 기도 운동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복음적인 개혁주의, 개혁주의적 복음주의를 주장할 만큼, 한국 개혁신학에는 앞뒤에 복음주의적, 개혁주의적 형용사가 붙어야만 되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적, 정통적, 칼빈주의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중심,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의 탁월하고 역동적인 신학임이 분명하다. 다만 그 고귀한 신학은 세속화되고 타락한 교권주의들이 스스로 개혁의 원리에 따라 개혁되어져야 개혁신학과 개혁교회의 진면목이 되살아날 것이다. 정통 개혁신학은 결코 현실과 역사의 실제성과 현실성을 외면한 채 과거집착의 복고신학이 아니라 구체적 역사 현실에서 성경 진리와 복음의 역동성을 구체적으로 삶의 정황에 적용시켜 하나님 나라가 현재 이 땅에서도 이루어져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확연하게 드러내는 변혁적, 역동적, 진취적 신학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교파를 초월하여 진정한 교회 연합을 추구하려면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간구하셨던 ‘대제사장 기도’를 묵상하고 명심하여야 하겠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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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모 목사(대구성명교회·대신대 교수)
2010년 02월 09일 (화) 13:02:38 기독신문 ekd@kidok.com
개혁원리 따라 스스로 개혁될 때 의미
신앙 훼손되지 않는 대화·포용은 계속
▲ 정준모 목사
1. 개혁신학의 연합운동 원리
한국교회는 성장의 갈채 속에 분열의 상처가 크다. 한국교회사는 괄목할 숫적 증가 속에 뼈아픈 사분오열의 찢어진 자국이 깊다. 한국교회는 장로교는 물론 모든 교파가 분열 되었다. 현재도 진리가 아닌 교권주의, 지역주의 문제로 마치 폭력의 아수라장이 된 정계처럼 가슴 아픈 현실이다. 합동은 무엇이며 통합은 무엇인가? 예수교는 무엇이며 기독교는 무엇인가? 예수와 그리스도를 갈라놓은 이 분열의 현장에 교회 연합과 일치를 위한 자성의 매질을 스스로에게 할 때가 이미 지나지 않았는가?
진리 안에서 연합과 일치
교회는 진리의 순수성과 교회의 연합성이 항상 병존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의 연합을 위하여 진리를 훼손해서는 결코 안 된다. 칼빈은 잘못된 교리와 생활에 대항하는 싸움은 연합과 일치를 파괴하는 분리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하나됨을 보존하는 일로 보았다. 오토 베버(Otto Weber)에 따르면 칼빈은 개신교의 공통적 교리라는 울타리 안에서 상호간 차이에 대한 관용적 입장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교회 연합과 일치는 진리가 왜곡되거나 이탈된 상황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오직 진리 안에서 진리를 근거로 연합과 일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진리 안에서 연합과 일치가 아니면 참된 연합(unity)이 아니라 획일적 일치(Uniformity)가 될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가 아닌 교파나 교단의 결정을 절대적 규준을 삼고 연합과 일치를 제한시키고 교류를 단절하는 등 극단적이고 폐쇄적 행동은 결코 개혁주의 신학 원리를 따르는 것이 아닐 것이다.
무분별한 분리는 절대 불허용
칼빈은 참된 교회의 표지를 말씀과 성례로 보고 교회가 이러한 표지를 이탈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일이며 반역자요 배도자로 간주하였다. 물론 칼빈이 주장하는 교회의 표지는 칼빈의 시대의 정황이고 현 한국교회 상황에서 재조명되고 재평가되어야 할 부분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오늘날 진리를 주장하면서 진리가 아닌 독선, 아집, 편견, 왜곡으로 말미암은 교회 분리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 개혁교회는 “가장 좋은 것은 모든 문제에 대하여 완전하게 의견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신앙의 총체에 해가 되지 않고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용인해야 할 것이다…사소한 의견차이 때문에 분별없이 교회를 저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라는 칼빈의 교훈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개교단 우월주의 극복
교단 절대주의, 타 교단 배타주의를 극복하고 성경적 교회로 돌아가 하나 되어야 한다. 자신이 속한 교단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을 가지되 타 교단에 대한 열린 마음으로 관용과 이해를 가져야 한다. 한국교회의 분쟁과 분파는 다른 진리 때문에 갈등과 분리의 길을 걷기보다는 대체로 편협과 왜곡과 이해관계에서 파생되었다고 보는 것이 교회사가들의 일반적 평가이다. 교회의 분열은 쉬워도 연합은 어렵다. 한번 분리되어 고착되어 버린 때에는, 다른 형제 교단으로 이해, 관용, 교류하기 보다는 이단적 색안경을 끼고 보는 부정적 입장들 때문에 다시 연합하기 결코 쉽지 않다. 또한 진리 문제를 제외하고는 타 교단의 정서, 입장, 특징을 최대한으로 다양성을 인정하고 수용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기 위하여 열린 자세로 상호 연대성을 가지고 연합과 일치를 위해 힘써야 한다. 그 좋은 역사적 사례는 26년 만에 이뤄진 합동 교단과 개혁 교단의 합동이다.
복음이 훼손되지 않는 종교 대화
1961년 WCC 뉴델리 총회, 1968년 웁살라 총회를 거치면서 종교다원주의가 발흥하기 시작할 때부터 종교간 대화 문제가 심도 있게 논의되었다. 1983년 WCC 밴쿠버 총회에서는 타종교인을 초청하여 종교간의 대화에 관한 신학적 주제 발표가 있었다. 더욱이 1990년 WCC 바아르 선언문(Baar Statement)은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하면서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공식 선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유일성을 포기해버린 그들과 종교적 대화가 가능한가가 참으로 의문시 된다. 더욱이 WCC가 추구하는 로마가톨릭과 일치, 종교간의 대화를 넘어선 종교통합의 목표는 절대 용납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타종교와 대화는 진리 교리와 복음 진리가 없는 인본주의적 만남은 결국 기독교의 꽃밭이었던 유럽교회가 황폐화되어 이제는 가장 절실한 선교 대상지역이 되어버린 그 비극적 역사 현장을 한국교회는 재현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1973년 WCC 방콕대회 이후 서구 제국주의 선교가 오히려 선교지를 억압했기에 이제는 더 이상 선교는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선교 모라토리움(Moratorium)을 선언하였다. 이것은 바울의 위대한 선교지였던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의 아름답고 위대한 하기아 소피아 교회당에 십자가가 사라지고 이슬람교의 초승달이 달려있는 모습이 내일의 한국교회의 투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역동성을 가진 개혁교회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시키기 위하여 타 종교인들에게 복음의 위대성과 진취성을 가지고 열린 자세로 국가 현안문제, 남북통일, 사회봉사 등을 위하여 독선적 외골주의 내지 폐쇄적 절뚝발이가 되지 말고 열린 자세로 만남과 대화의 길을 열어 놓아야 된다. 그러나 숙지해야할 사실은 WCC가 주장하는 연합은 단지 참다운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뿐만 아니라 타종교까지 포함된 연합이다. 또한 WCC의 그리스도의 구원 개념을 기독론적 구원 즉, 십자가 복음과 죄 용서의 수직적 복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교 입장에서 사회구조악으로부터 구원인 수평적 차원에서 인본주의 연합일 뿐이다.
2. 신학적 경계선 선언: 개혁주의와 복음주의 차별화
한국 교계 내에서 복음주의라는 용어만큼 가장 신학적 전문용어로 애매모호하게 사용되는 말은 없을 것이다. 한국 교계에서는 현실적으로 복음주의라는 용어는 자신들이 지지하는 신학적 입장이 가장 성경적이고, 정통적이고, 건전하고, 복음전도와 교회성장을 지향하고 있다는 방편으로 복음주의를 신학적 정립 없이 무분별하게 남용하고 고착해 버렸다. 개혁주의라는 말을 쓰면 시대에 뒤 떨어지는 구식 같고, 자유 혹은 진보주의라는 색깔을 보이면 신학적 시비에 휩싸일 것 같아 신학적 회색지대를 서성거리는 자들이 많다. 그들은 대외적으로는 신학적 진보주의를 추구하고 내적으로 개혁신학 미온주의 내지 교권 내 겁쟁이들이 됐다. 이처럼 신학적 타협추구자들은 신학적 회색지대에 머뭇거리면서 복음주의라는 옷을 입고 결국은 세속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을 향하여 군침을 흘리고 있다. 이처럼 건전하고 건강한 복음주의라는 용어가 한국 장로교 상황에서는 개혁주의라는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 자유주의, 진보주의를 추구하는 자들이 신학적 중용주의자, 신학적 회색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말이 되고 말았다. 벤자민 워필드(Benjamin B. Warfield)의 “기독교의 가장 큰 위협은 반기독교 세력이 아니다. 이슬람이 아무리 칼을 들이 대도 기독교를 없앨 수는 없다. 아무도 불교가 기독교를 삼킬 것이라고 걱정하지 않는다. 도리어 시대마다 등장하는 타락한 기독교야말로 기독교의 생명을 가장 크게 위협하는 존재다”는 말을 뼈아픈 말로 기억하고 우리 개혁주의를 추구하는 목회자, 신학자, 성도들은 각성과 자성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 한국교회는 〈교회의 위기: 신학교육의 재앙〉 이란 명저에서 꼬집은 존 리이스(John Leith)의 주장처럼, “교회 내의 가장 심각한 위기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대한 분명한 고백이 없는 것이다”는 말을 심각하게 들어야 할 것이다. 그는 미국 교회의 위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배제되고 포용주의와 다원주의 바탕을 둔 신학교육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신학교육이 정통교리보다 사회윤리, 사회참여, 인도주의 활동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세상문화와 차별화된 명확한 기독교 비전을 갖지 못했고 교회 강단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신랄하게 질타한 그의 결론을 한국교회는 겸손히 듣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메이쳔(John Gresham Machen)은 신학적 포용주의는 “적의 장수보다 더 무서운 존재인 적과 내통하는 아군 병사이다. 의심받지 않는 가운데 어느 순간 성문을 열어주는 자이다. 이단자와 거짓교사와 자유주의 신학자는 정체가 뚜렷하기에 교회가 경계태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면서 또한 자유주의 기독교에 교회의 문을 개방하는 사람은 이단자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유해하다”는 경고는 작금 한국 개혁주의를 표상하는 교단내의 현실이 아닌가?
3. 제 10차 WCC 부산 총회: 갈등 극복 및 발전적 제언
한국교회는 2013년 부산개최 WCC총회를 마치 신이 내린 축복처럼 들뜬 축제로 이끌어가는 진보측이나 무조건 반대를 위한 반대로 시위를 하고 집회장을 탈취하는 등 세상 사람들에게 진부하거나 추악한 꼴을 보여서는 안 된다. 한국교회가 급선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신학적 과업이요 작업이다. 또한 목회자와 성도들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교육과 이해가 요청된다. 교단적으로 우리의 개혁주의 신학의 탁월성, WCC 신학의 문제점, 한국교회의 복음 전도 사명 고취를 위한 특별 교육과 기도 운동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복음적인 개혁주의, 개혁주의적 복음주의를 주장할 만큼, 한국 개혁신학에는 앞뒤에 복음주의적, 개혁주의적 형용사가 붙어야만 되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적, 정통적, 칼빈주의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중심,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의 탁월하고 역동적인 신학임이 분명하다. 다만 그 고귀한 신학은 세속화되고 타락한 교권주의들이 스스로 개혁의 원리에 따라 개혁되어져야 개혁신학과 개혁교회의 진면목이 되살아날 것이다. 정통 개혁신학은 결코 현실과 역사의 실제성과 현실성을 외면한 채 과거집착의 복고신학이 아니라 구체적 역사 현실에서 성경 진리와 복음의 역동성을 구체적으로 삶의 정황에 적용시켜 하나님 나라가 현재 이 땅에서도 이루어져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확연하게 드러내는 변혁적, 역동적, 진취적 신학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교파를 초월하여 진정한 교회 연합을 추구하려면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간구하셨던 ‘대제사장 기도’를 묵상하고 명심하여야 하겠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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