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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피스테애스를 다 옮기고 나서

       (1998년 작성, 2003웹문서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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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식

세요약

 

'깊은 은혜 크신 사랑' 엄마 아빠 빠알간 카네이션 밑 노랑 분홍 리본 끈에 담긴 내 마음이었다. 일흔 두 해 세 해 넘기신 분들이 사르시는 혼은 사십 줄을 바라 보는 아이 입에서 탄성을 내 품게 하나, '사람'들의 싸늘한 시선들은 내 가슴을 째어 피 흐르게 한다. 아마 이들의 차가운 마음은 그들의 주변 아낙네들 때문이기도 할 것이라는 게 내 추측이기는 하나, 그들 본디 마음일 수도 있다고 사료되기 때문이며, 무엇 보다도 중요한 것은 영혼 깊은데서 나오는 바램인데, 그들의 바램은 엄마 아빠가 지금 하는 일을 그만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그만 두는 것이 그 분들의 바램이실까? 이 어려운 고리를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

반쪽 허리 아픔을 낙으로 삼으시는 어머니가 거친 젖은 험한 산을 가파르게 앞서 세 개나 넘으심은 장정인 나를 부끄럽게 하는 생의 약동이었으며, 시장에서의 외침은 나약한 아들들을 꾸짖으시는 호령으로 되살아 온다. 엄마 익성이는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며 순간 순간 살으시는 엄마 아빠따라 당신들의 꿈들을 제가 살아 있는한, 이루어 낼 것입니다. 아니 두 분 살아 생전에 반드시 보여 드리께요......

 

아차도에서 나온지 벌써 5일이 넘어간다. 상큼한 갯 내음 휘도는 바람 바다 소리 뻘 속에 박힌 살들 소라 등대 비치는 황혼 넘실대는 불 어우러져 들려 오는 산 바다 끝 없는 물 숨쉬는 소리 고요 끝에 실리는 평화 모든 게 벌써 그립다. 여기 서산도 서울에 비하면 천국이지만 웬지 그리워지는 섬은 자꾸만 나를 설레게 한다. 이 설레임은 자연이 나에게 주는 생명이요 자연을 향한 나의 떨림임과 동시에 지혜의 근원이리라.

 

지혜를 진짜(온토오스 o;ntwj( 216c6) 사랑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누구이며, 지혜로운 척 꾸며대는(플라스토스 plastw/j( 216c5)자가 있다면, 그는 또 누구일까? 지혜로운 척 꾸며 대는 이 자를 추적하는 것이 소피스테애스 편의 가장 큰 줄기이며, 처음(218b7-c1)과 끝(268d3-4)이다. 그런데 소피스테애스(소피스트)는 그 이름에서 보여지듯 필로소포스(철학자)와 그 뜻이 비슷 할 것처럼 보이므로, 가짜 아닌 진짜 필로소포이(철학자들, 216c6)를 소피스테애스와 구분하는 것은 헷갈릴 것 같다. 더군다나 진짜 철학자들은 때론 정치인 때론 소피스테애스 심지어는 미친 자로까지 그 모습이 달리 보여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소피스테애스에서는 '진짜 철학자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오히려 철학자인 것처럼 행세하는 소피스테스가 무엇인가를 폭로함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철학자를 그러한 소피스테애스와 혼동하지 말고 소피스테애스로부터 그 철학자를 분별(디아크리케앤, 226c8)해 내도록 한다. 따라서 철학자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인가 라고 평소에 의문시 한 결과, 철학자란 필요 없어 라는 억견을 지닌 자는 이 대화 편을 다시 꼼꼼히 읽으면서 (원문을) 써 보는 것도 좋을 성 싶다.

이 책에서 소피스테애스가 무엇인가를 때론 직접 말 해 주면서 때로 듣는 이의 입에서 소크라테애스라는 단어가 튀어 나오도록(225e6)유도 해 가는 사람은 엘레아에서 온 낯선이이지 소크라테스가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처음에 몇마디 그와 나누다가, 테아이테애투스가 이 낯선이의 이야기 상대로 결정되자, 끝까지 묵묵히 듣기만 한다. 한 마디도 않는다. 본디 이 낯선이는 이야기 향연에 참석하기로 약정된 사람이 아니라, 테오도로스가 소크라테스와 어제 한 약속에 따라 모임 장소에 오다가 만나 데려온 파르메니데스와 제논 계열에 속하는 엘레아 사람이다.

 

이 뜻하지 않는 손님이 오자 소크라테스가 그에게 '소피스테애스와 정치꾼과 철학자는 단지 하나의 류(게노스) 또는 두 가지 류인가, 아니면 각기 구분되는 세 가지 류(217a7)에 상응하는 이름들을 지닐까' 라고 물어 보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이렇게 전개되는 대화 편 소피스테애스는 다음처럼 5 부분으로 나누어 질 수 있다.

첫째, 이 책 서론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소크라테스 테오도로스 엘레아낯선이 테아이테투스 이 네 사람이 만나 서로 인사하면서, '소피스테애스는 무엇(ti,( 218c1)인가' 라는 물음을 공동으로 제기하는 부분(216a1-218b4). 둘째, 공통의 한 이름을 두 가지 에이도스(219a8)로 계속 나누는 방법(메쏘도스, 219a1)이 쓰여지는 엘레아 낯선이와 테아이테투스 사이의 주고 받는 대화 속에서 이 물음에 대한 답 여섯 가지가 이어지는 부분(218b5-232a7). 셋째, 여섯 번 째 답에 이어지는 것으로서, 있는 것들을 모방하는 자들이 바로 소피스테애스다 라고 낯선이가 단언 함으로서, 화제가 있지 않는 것과 있는 것으로 옮겨지는 부분(232b1-260b9). 넷째, 있지 않는 것과 연관되는 화제로서 로고스와 억견(의견, 독사)을 다루는 부분(260b10-264d2).

 

"그렇다면 먼저, 있지 않는 것이 로고스와 억견(독사)에 포착되는 지 또는 [로고스와 억견] 이 둘 모두 전적으로 진실한지 그리고 어느 것도 결코 거짓이 아닌 지를 보다 더 선명히 논의하기 위해서, 내가 방금 말했던 것처럼, 이제 우리 로고스와 억견을 취해 보도록 하세(216b6-b9)"

 

마지막으로 다섯 째, 다시 나눔의 방법을 통해 대중 선동가와 소피스테애스에 다다르는 가운데, 정치인과 철학자가 이 두 가지 류와 분별되는 부분(264d3-268d5). 이렇게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지는 대화를 통해 소피스테애스는 '지혜를 모방하는 자'(미메애테애스 오온 투 소푸우, 268c1)임이 드러난다.

 

위 다섯 부분은 진술 방식에 의해 차이나기도 한다. 도입 부분은 네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 형식을 띠고, 두 번째 다섯 번째  부분은 하나의 에이도스가 하위 에이도스로 계속 나뉘는 형식을 띠며, 셋째 넷째 부분은 있지 않는 것과 있는 것 그리고 로고스와 억견이 설명되는 형식을 띤다. 그러나 셋째 넷째 부분도 류에 따라 나뉘는(253d1) 방식이, 넓게 보면, 드러난다. 이렇게 나뉘는 길을 아래 도식으로 나타 내 보자

 

  

 

 

 

 

 

 

 

 

 

 

 

 

 

 

 

 

 

 

 

 

 

 

 

 

 

 

소피스테애스를 규정하기 위해 먼저 낯선이는 소피스테애스와 같은 류(221d9)의 인간인 낚시꾼의 로고스(221b1)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낚시꾼은 소피스테애스 보다 더 잘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더 친숙하면서도 덜 북잡한 사람이며, 같은 부류의 이 두 사람은 모두 기교를 지니기 때문이다(219a5, 221c9).

위 도식에서 필기체로 나뉜 부분은 낚시꾼에 연관 된 것이고, 명조체로 나뉜 부분은 소피스테애스에 연관된 것이며, 두 겹으로 갈라진 부분 중 하나는 명조 다른 하나는 필기체로 나뉜 부분은 낚시꾼과 소피스테애스에 공통인 것이다. 그리고 곧은 사선으로 연결된 부분은 각기 해당 로고스이다. 다시 말해, 윗 왼 쪽에서 아래 오른 쪽으로 곧게 그어진 비스듬한 선 중 진한 필기체 부분은 낚시꾼의 로고스이며 진한 명조체 부분은 소피스테애스의 로고스이다.

 따라서 비스듬한 선으로 이어진 진한 필기체 낱말들을 모으면 낚시꾼을 정의하게 되고, 진한 명조체 낱말들과 생물 이전까지의 진한 필기체 낱말들을 모으면 소피스테스를 정의하게 된다. 이에 따르면, 낚시꾼은 수중 수영 생물을 낮에 갈고리로 아래에서 위로 어거지로 쳐 올려 사냥 획득하는 기교를 지닌 사람인 반면, 소피스테스는 길들여진 육상 생물을 돈 벌려고 미끼로 유혹 해 사적으로 설득 어거지 사냥 획득하는 그리고 논의 논박 논쟁하는 싸움을 가르치면서 짧은 거짓 억견을 모방하여 되 물음과 비슷한(231a4-5)방법을 통해 영혼을 정화하는 그리고 영혼 장식품으로서의 덕에 관한 자신의 앎 또는 남의 앎을 돈 받고 부유한 젊은이들에게 파는 또는 가르치는 자발적 교환 획득 기교를 지니는 그래서 결국 판타스마(환상)을 생산하는 그러한 사람이다.

 

소피스테애스 편은 이렇듯 소피스테애스의 로고스 또는 정의를 찾아간다. 찾아가다 보면 슬며시 소피스테애스가 무엇인가 가 드러난다. 따라서 이 대화편은 소피스테스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에, 그래서 이러한 소피스테스로부터 진짜 철학자를 분리 해 내는 것에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 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 약 오 분의 삼 정도 되는 많은 지면이 나눔에 의해서 소피스테애스를 규정하는 데에 할애되는 것이 아니라, 있지 않는 것과 있는 것을 규정하는 데에 할애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대화편의 부제인 '헤애 페리 투우 온토스, 로기토스: 있는 것에 관한 논증'에서 보여지듯, 전체적으로 보아, 소피스테애스는 있는 것에 관해 주로 설명하고, 그 다음으로 논증(추리), 곧 나누는 방법을 통해 소피스테에스를 정의한다. 그러나 이 두 부분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합하여져 소피스테애스의 정체를 드러낸다. 그러는 도중에 있는 것이 설명 될 뿐이다. 소피스테애스 끝나는 글월을 인용하면서, 이 들어가기를 마치려 한다.

 

" 논박 기교의 부분인 그리고 에이두라 만드는 기교의 심상적인(환상적인) 류에 속하는, 그리고 신성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그리고 생산적인 행위의 기만적인 부분이라고 말들로 규정되는, 그리고 억견 기교를 통해서 속이는, 그러한 모방, 이런 족보와 혈통을 실제로 소피스테애스는 지닌다 라고 말하는 자가 내 의견(억견)으로는 가장 진실되게 말하고 있네: 낯선이

   분명히 그러합니다: 테아이테토스(268d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