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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문
2010.02.25 22:00

맑스주의와 기독교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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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글을 쓸 때는 비록 맑스주의자가 아니었지만 여느 맑스주의 자들처럼  세계를 인식하기 보다는 세계를 변혁시키고픈 충동에 이끌리곤 했던 대학 4 학년 때였으며, 이 글을 쓴 동기는 철학과 학생회지 '철학' 창간호에 '맑시즘과 기독교'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보내달라는 요청 때문이었고, 그리고 그 글을 쓴 년도는 지금부터 23년 전인 1987년이었으니, 그 꿈까지 남아있는 거리에 있어서도 그리고 그 꿈을 이루어 낼 수 있는 사회적 위치와 능력에 있어서도 그리고 그 꿈을 이루는데 걸리는 시간에 있어서도 그 때의 나는 현재의 나와 달랐다. 그렇다고 나 자신이 변한 것은 아니었으나, 지금까지의 나는 현재의 나와 그리고 미래에 있을 나와는 달리 철학적 사유에 기꺼이 머물러 있었으며 그래서 철학자들이 지니는 생각의 한계와 고민에 그 동안 주욱 빠져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이제 철학이라는 껍질을 벗고 나와야 만 하는 지금, 나는 다시 상념 하나에 빠진다. 벗어나면 정말 시원할 줄 알았는데 그리고 벗어 날려니 정말 시원하긴 한데, 단 하나의 아쉬움. 즉 과거 이십년 동안의 철학함이 진짜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아쉬움 때문이다. 지혜를 탐색하며 그리고 지혜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철학함이기에,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는 것 자체는 인생 황혼녁에야 비로서 가능한 것이기에 그렇다. 철학을 버릴 때 비로서 철학자로 살아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일종의 역설이 나를 안심시키기도 하지만 말이다. 내 삶의 목적은 내 모든 것을 어느 한 순간의 찰나에 버리는 것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든가

학위 논문들 이외의 글들을 찾아 보았다. 우선 눈에 뜨이는 것이 '철학과 학회지 창간호' 중간 색션(48~57쪽)에 철학논단-학생논문으로 실린, 'Marxism과 基督敎'였다. '원효의 대승기신론 소(疎)에 나타난 무명(無明)의 이해' 라는 제목의 학부논문 원고는 내 눈에 뜨이지 않았다. 어딘가 있으리라.

맑스주의와 기독교라는 제목의 글을 써달라고 나에게 부탁해 오면서 그 후배는 간결하게 이 둘을 비교 해 달라는 것이었다. 지금 누가 나에게 또 같은 부탁을 해 온다면 아마 나는 일언지하에 거절할 것이다. 비교에 정력을 쏟느니, 차라리 어느 하나에만 메달리는 것이 나에게 보탬이 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비교한다는 것, 그거 참으로 힘든 일이다. 더구나 비교의 대상이 하나는 유사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일 때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3년 전의 나는 덮석 그 부탁을 받아 들였다. 그리고 용기도 가상하게 대학 도서관을 뒤지기 시작했으며, 이내 내 손에 일서(日書)가 들려졌는데 그 제목은 'マルクス 主義と基督敎 '(맑스주의와 기독교, 矢內原忠雄, 名古室市, 一粒社, 1933년)였다.

그 책의 저자 야나이하라 타다오 やないはら ただお,(矢內原忠雄 실내원충웅, 1893년 1월 7일 ~ 1961년 12월 25일, 오른쪽 사진)는 1920년에 니토베(新渡戶稲造)의 후임으로 동경제국대학 경제학부 식민지 담당 조교수가 됐다가 개조(改造)라는 잡지에 기고한 발표한 두 편의 글이 문제가 되어 대학에서 물러 났으나 전쟁이 끝난 후 다시 1951~1958년 2차례에 걸쳐 동경대학 총장을 역임했으며 동년인 1958년(昭和 33년)에 동경대학명예교수라는 칭호를 받았던 反戰•非식민주의를 주장했던 학자로서, 우찌무라간조(內村鑑三, 1861.3.26. ~ 1830. 2. 28.)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적 신앙을 가진 1930년 대 일본기독교계 지도자이다. 우찌무라 간조가 죽은 후 3 개월 째 되는 날(1930년 5월 28일)에 우찌무라를 추모하여 모인 집회에서 그가 행한 연설 '內村先生對社會主義'(우찌무라 선생과 사회주의)가 그의 '맑스주의와 기독교'라는 책 부록에 실려있는 것과 그 제목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우찌무라 간조와 야나이하라 타다오는 무교회주의자들이었던 서로에게 신앙의 동지였다. 비록 전자가 후자에게 영향을 미쳤기는 해도 말이다.

우찌무라 간조(1830~1930)가 죽은지 3년 째 되는 해인 소화 7년(1933) 당시 학계를 주도하고 있는 사상 중의 하나는 생전에 공산당 선언이라는 책자를 펴냈던, 후일에 소련 공산당 이데올로기를 제공한 카알 맑스의 것이었다. 바로 이 이데올로기와의 싸움을 통해 야나이하라는 신앙과 과학을 서로에 모순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양립 가능한 것으로 보게된다. 자유주의신학을 수용하는 자들이 취하는 대부분의 입장인 것이다. 그래서 내가 야나이하라 타다오 뿐만 아니라 우찌무라 간죠 등의 일본 기독교계 지도자들에게서 칸트의 자유 계몽주의적 사상의 일부를 보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야나이하라는 당시 학계의 지배적 전제였던 맑스주의와의 싸움을 통해서 신앙과 과학의 문제를 집어 든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야나이하라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 과학과 신앙의 문제는 차원이 다른 것이어서, 그 사이에 단층이 존재한다. 과학에는 과학의 세계가 있고 신앙에는 신앙의 세계가 있다. 그것은 다른 세계이다. 그러나 과학을 열심히 배움에 의해서 신앙 사이의 미신적인 요소를 제거할 수 있다. 또 순수한 신앙에 의해서 과학에 고결한 정신과 희망을 줄 수 있다. 이렇게 하므로서 나에게는 그 문제가 해결됐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전집 26:241~2). 바로 이 문제의 해결책이 그의 책 '맑스주의와 기독교'이다.

과학과신앙의 세계를 서로에 독자적인 것으로 구분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칸트식의 방법을 받아들인 것처럼 보인다. 나아가서 순수한 신앙에 의해서 과학에 고결한 정식과 희망을 제공할 수 있다고 본 것 역시 칸트의 그것과 유사한 맥락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실천을 통해서 그 양자를 매개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야나이하라와 칸트 이 두 사람을 자유신학자에 귀속시킨다.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역시 야나이하라를 ‘온건 기독교적 자유주의자’로 평한다(100년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17. 동양이 본 개화기 조선-박노자 교수,  2003년 5월 28일, 중앙일보).

관련 문서: 야나이하라 타다오, 맑스주의와 기독교의 출발점,  이데올로기로서의 이슬람과 공산주의,

참고문헌: 1) 일본기독교의 발자취 ( 김수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교육부. 서울. 한국. 2003.)
              2) マルクス 主義と基督敎 ( 矢內原忠, 一粒社, 名古室市. 일본. 1933.)
              3) 2002 한국기독교회사 (박용규,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한국교회사연구소. 서울. 한국. 2002.)
              4) 사이트: http://www.asahi-net.or.jp/~hw8m-mrkm/kate/00/yanaihara.lif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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